LA 한인회(회장 로라 전) 문화 예술 분과 위원회는 3월12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문화의 샘터” 무료 예술 강좌를 개최한다. 이번 강의는 정찬열작가의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이다.

 

많은 분들이 글쓰기를 원하지만 글쓰기의 기본을 몰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번 강의는 글쓰기에 대한 기본이 되는 방법들을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한글을 아는 분이면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도록, 자기 생각을 어떻게 펼쳐내고 전개하고

마무리 해야하는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독자가 공감하고 감동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가를 실제 예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면 책 한 권은 되고도 남을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 가슴 속에 묻어둔 사연을 글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자서전을 쓰고 싶은 분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정찬열

 

–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1999년) / 계간 <문학의식> 평론 등단(2015년)

–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 / <내땅, 내발로 걷는다> / <아픈허리, 그 길을 따라>

/ <산티아고 2000리> / <북녘에서 21일>

– 미주가톨릭문협 회장 역임 / 오렌지카운티한인회 이사장 역임

– 현,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장 / <문학세계> 편집인 / 민족문제연구소L.A지부장

– 이메일: noproblem1018@daum.net / 블로그 : blog.naver.com/jungchan10

LA 한인회 문화의 샘터는 한인사회 문화 역량을 높이고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2017년 3월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20회가 진행되었다.

 

1  2017 3월 판소리 김원일 단장
2       4월 한국 문학 김문희 시인
3       5월 오페라의 세계와 역사 이사효 성악가
4       6월 서예기본 정균희서예가
5       7월 발레가 일상을 만나면  한미무용연합회 진 최 단장 
6       8월 광복절 특별 문화공연  
7       9월 서양 미술사 한석란 화가특강
8     10월 전통한국무용 김응화 무용가
9     11월 모듬북  이서령 고르예술단장
10 2018 4월 사진 이것만은 알고 찍자  김상동 남가주 사진협회 회장 
11      5월 대화의 기법 유미옥 방송인 
12      6월 발성의 기법 노형건단장 오페라 캘리포니아 
13      7월 태권도의 역사와 자기 방어법 정종오관장
14      8월 역사 속 우리의 삶과 문학 김학천 박사
15      9월 파워 라인댄스 강현강사
16      10월 치과와양생법 배윤범박사
17     11월   기와 건강 왕다운 원장
18      12월 여행과 인생 박평식대표 아주관광
19 2019 1월 공예를 통한 힐링과 지기발견                 그레이스장 공방
20      2월 페퍼 플아워 아트  “ 무궁화 ”                                  김은진 작가

 

 문화의 샘터는 매달 두 번째 화요일 오후 6시 30분 LA 한인회관에서 진행된다. 간단한 식사가 제공된다. 원하는 강좌나 전문 예술인 강연자를 추천하여 주기 바란다. 예술,문화 각 분야 전문 강사를 초빙한다. 문화의 샘터는 한인 누구나 무료로 관심사를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평소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를 위한 행복한 문화체험 나들이가 될 것이다. 엘에이 한인회 문화의 샘터 배움을 통해 예술가의 열정을 품어보자.

한인회 : 323- 732-0700    언제 : 3월12일 화요일 오후 6시 반

어디서 :  LA 한인회  981 S. Western   이메일: info@kafla.org

강좌 종류: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

 

 

좋은 글이란 ‘잘 쓰인 글’ 이 아니라 읽고 나서 ‘감동을 주는 글’이다.

글도 훈련과 연습에 의해 어느 수준까지는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글은 드물다. 다소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과장됨 없이 진솔하고 꾸밈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라야 비로소 읽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놓는다.

 

– ‘좋은 생각’ 심사평에서 –

 

<# 2 >

문학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분노나 놀람, 슬픔 같은 감정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감정 자체로 글 속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의 마지막 행을 읽은 후에 독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나야 한다. 분노는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김현의‘행복한 책 읽기에서’ –

<#3>

글쓴이와 독자 사이에는 ‘문장’만 존재한다.

말은 소리의 크기나 음의 고저, 그리고 감정이 실리고, 몸짓도 가세하기 때문에 소통이 편리하다. 그렇지만 글은 독자가 그 글 속에 담겨 있는 내용만 가지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4>

문학의 핵심은 “감동” 이다

“모든 예술은 감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 로댕 –

 

<#5>

문학의 목적(기능) – 인간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

 

<# 6>

, 똑. 두 번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뺨에는 보조개가 있고 단정하게 뒤로 빗은 머리 뒤에는 파란 리본 핀을 꽂은 40대 여성의 얼굴이 보입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내 한국어 엑센트가 다른 날 보다 유난히 엉망입니다. “안녕….하세…..” 그녀의 목소리도 갈라졌습니다. 인사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나를 꼭 안고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던 소셜워커가 통역을 해줍니다. “미안하다고 하네요, 진짜, 진짜, 미안하다고.”

친 엄마를 만나는 3시간 30분 동안 나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깊은 아픔을 이해한 순간 난 울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내가 흘린 눈물이 엄마에게 안도감을 주었음을.

 

……(중간 생략)

 

헤어지기 전 엄마는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주고 밖에 내리던 비를 맞지 않게 나를 꼭 끌어안아 우산으로 가려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엄마의 모습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했습니다.

-25년 만에 한국 생모와 상봉한 LA타임즈 입양아 칼럼 중에서 –

 

 

<# 7>

밤이 이슥하여 뒤뜰에 나갔더니 달빛이 환하다. 마른 가지 끝에 망울을 터뜨리는 매화꽃이 달빛아래 새침하다. 대보름이 엊그제였다는데 어느새 달이 많이 기울었다. 구름사이로 흐르는 달을 보면서 까마득한 옛일이 엊그제 일인 양 떠올랐다. .

정월 대보름을 쇠고 나면 농촌에선 딸막딸막 농사 준비를 시작했다. 농기구를 꺼내어 고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미리 장만해 두느라 손길이 바빠졌다.

30여 년 전, 바로 요맘때쯤의 어느 영암장날.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집안 아재를 따라 영암장에 지게를 사러 나갔다.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마을인지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읍내까지 20리 길을 꼬박 걸었다.

지게전엔 지게들이 장터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키가 작은 내 몸에 딱 맞는 지게는 없었다. “너맘 때는 옷이나 지게는 조끔 큰 것이 좋아야” 하는 아재 말씀을 따라 내 몸에 조금 헐렁한 지게를 샀다. 낫과 괭이 호미 등, 농기구 몇 개와 씨감자 한 포대를 사서 지게 위에 얹었다. 제법 묵직했다.

지게를 지고 장터를 빠져 나오는데 아재의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신발이나 새 옷이 닳아지고 낡아지면 비로소 몸에 맞게 되던 일이 생각나면서, 지게질을 하며 살아가야 할 세월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형편을 보아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해보자는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몸이 지게에 맞게 되면 나는 또 어른용 지게를 사야하는가. 아재의 말씀이 운명처럼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침울한 내 기분을 눈치 챘는지 아재는 음식점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국밥집에서 순대국을 한 그릇 먹는 동안, 아재는 미리 와 있던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분 좋게 들이켰다. 얼큰해진 그는 나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하셨다.

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길은 아침보다 훨씬 팍팍하고 멀었다. 등에 진 지게가 자꾸 뒤뚱거렸다. 지게와 몸이 따로 놀았다. 처음엔 견딜 만 했던 물건들이 시간이 갈수록 어깨를 짓눌러왔다. 지게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길가 짚더미에서 지푸라기를 뽑아 둘둘 말아 어깨와 멜빵 사이에 끼웠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깐, 집은 아직 멀었는데 짐은 무거워가기만 했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고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조그만 녀석이 큰 지게를 지고 낑낑대며 걸어가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어떤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지나쳤다. 오가는 장꾼들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마침 쉴만한 곳이 보여 지게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바로 그때, 친구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중학을 함께 졸업한 친구였다. 친구의 아버지도 함께 섰다. 쑥스럽고 난처하고 당황스러웠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광주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서 있던 그 잠깐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친구는 아버지를 따라 떠나고,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타박타박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서러웠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지게를 내 팽개치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 집 장남이었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는 해가 길게 내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등에 진 짐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터벅터벅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우리 집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지게를 받쳐놓고 얼른 세수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큰 소리로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 소리치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지게에서 짐을 내려놓을 때 거들어 주었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계셨다.

지게를 사 짊어지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설음이 복 받쳐 올랐던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고왔던 손은 어느새 거칠 대로 거칠어져 나무껍질이 되어 있었다. 교육자의 부인으로 살아오면서 농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머니. 공부대신 아들에게 지게질을 시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 것인가. 눈물이 핑 돌았다.

뒤뜰 우물로 나와 대야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다시 세수를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들 배고파요, 어서 밥 주세요” 소리쳤다. 밥상 위에 고봉밥이 담겨왔다. 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하따 달이 참 징허게도 밝다 잉, 저 달도 찼다가 찌울었다 하지 안티야 안” 그 날도 오늘밤처럼 둥근 달이 우리 집 초가지붕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정찬열, <지게 사 오던 날> 전문 –

 

< # 8 >

예술은 설명이 아니고 감동이지요. 감동은 일상에서 옵니다. (일상의 존중)을 모르는 예술작품들은 억지지요. 일상의 재구성을 통한 긴장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예술일 때 공감을 넘어선 감동이 일지요.

 

– < 김용택의 글 중에서 >- 한겨레신문 연제 글에서

 

<#9>

“산이 좋아, 나는 / 길 따라 올라가는데 / 물은 / 산을 버리고 / 떠나는구나 // 한 세월 /

더불어 살다보면 / 싫증날 때도 있겠지 // 버리고 떠나는 저 길이 / 그리움의 시작인 줄을 /

세상 내려가 살다보면 / 산 만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 촐랑거리며 흐르는 / 저 물이 / 알기나 할까 // 산이 좋아 오늘도 / 나는 / 산길을 올라가는데 ”

‘산길을 오르며’ 라는 이 졸시를 오래 전, 이곳 일간지에 발표했다. 신문에서 시를 읽은 아내가 물었다. “당신, 나 보라고 이 시 지었지요?”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알았으면 됐네 이 사람아, 그렇지만 뭐 꼭 당신한테만 하는 얘기겠어….”

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시가 발표된 며칠 후 어떤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는데 시를 읽고 나서 마음을 바꾸게 되었고,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글 한 편이 이렇게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는가 싶어 놀랐다.

그랬다. 힘든 시절이었다.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왔지만 낯선 땅에 뿌리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들은 먹고 사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싹뚝 베어다 접을 부쳐놓은 나뭇가지가 몸살을 앓으며 겨우 싹을 틔워내는 형국이었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인 그 때, 아내는 새벽에 직장에 나갔다가 오후 늦게 들어왔다.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끝난 다음 데려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세금보고 수입 난에 땡전 땡푼을 기록했던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는 길에 맥도널이나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나갈 때면 녀석들이 눈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운전 중인 아빠를 쳐다보았다. 군것질을 하고 싶다는 신호인줄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척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잘 아는 분의 딸이 아르바이트로 칼 한 세트를 팔러 왔는데 사 주지 못한 기억도 그 때쯤의 일이다. 칼 한 세트의 값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녀석이 머쓱해 하며 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민망했다. 녀석은 물론 녀석의 부모에게도 미안하고 면목 없는 일이었다. 돈이 인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자식에게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주지 못한 것 못지않게 가슴이 아팠다.

형편이 어려우면 방법을 찾아보아야 했다. 주말에 스왑밑에 나가 좌판을 펴고 돈벌이를 하던 어떤 분이 장사가 쏠쏠하니 한 번 해보겠냐고 물었다. 허지만 주말에 한국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터라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이 급한데 남의 아이들 가르치느라 시간을 낼 수 없다니. 아내의 말대로 나는 돈 안 되는 일에만 열성을 보이는 한심한 가장이었다.

경제가 어려우면 별거 아닌 일로 부부사이에 티걱태걱 하는 일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쌀쌀한 집안 분위기는 아이들이 먼저 눈치를 챈다. 녀석들이 보기에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나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아빠, 내가 잘못했어요. 엄마와 헤어지지 말아주세요.”라는 글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물 글썽한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들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저 어린 녀석이 얼마나 불안했으면 이런 편지를 썼을까. 이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까. 아빠가 잘못했다. 나는 아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약속을 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헤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나서 이 시 한 편을 썼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쪽지를 건네던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 때, 아빠를 바라보던 녀석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편지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성인이 되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다. 젊음은 설익음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대추 한 톨을 익히기 위해 햇볕이 쪼이고 비바람이 불고 태풍이 몰아친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다. 세월과 함께 익어간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야한다. 힘들면 쉬어갈 줄 알고, 언덕이 가파르면 손을 잡아 끌어줄 줄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작은 일을 못해 파국에 이르기도 한다.

하마터면 아내와 헤어질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이 아니던가.

괴로웠던 일도 힘들었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나도 이제 철이 좀 들었을까. 지난날을 되새겨보던 어느 날, ‘아내’라는 시 한편을 썼다.

“대숲이 / 바람에 쓸린다 // 속 빈 대나무를 저리 / 높이 키워 올린 것은 / 큰 바람에 낭창 휘어지다가 / 버팅기며 끝내 일어서는 것은 / 짱짱하게 받쳐 준 / 마디 / 때문이다 ”

시 두 편 사이를 걸어온 세월이 아슴하다. 내가 만들어 걸어온 길이다. 돌아보면 아슬하고 아득한, 그리고 아늑한 추억이다. 내 앞에 남아있는 길은 어떤 길일까. 궁금하다.

 

– 정찬열, <시 두 편의 세월>

 

<#10>

“ ‘ OOOO년 O월 O일 / 우리 엄마 서울 가분 날 ’ // 일곱 남매 막둥이 / 국민학교 3학년 진국이가 / 엄마 서울 간 날짜를 / 마루 끝 벼람박에 / 까망색 크레용으로 비뚤비뚤 써 놓았다 // 세 밤만 자면 / 돈 많이 벌어 돌아오마던 / 소식 없는 엄마를 / 손꼽아 기다리던 / 우리 집 막둥이 // 녀석은 날마다 학교가 파하면 / 방죽에 나가 낚시를 하다가 / 어둔 무렵에야 돌아왔다 // -그만 놀고 밥 묵어라 아 – / 해질녘, 아이를 불러들이는 엄마들의 / 목소리를 들었던 때문일까 / 아홉 살짜리 강태공 / 말이 없던 녀석의 그렁그렁한 눈동자엔 / 먼 산만 가득했다 // 내 유년의 뒤안길 / 아스라한 세월 저편 이야기지만 / 생각나기만 하면 / 지금도 가슴이 아려오는 / 내 동생 진국이가 써 놓았던 / 그 때 그 담벼락 글씨 ”

이 시는 ‘우리 엄마 서울 가분 날’이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쓴 글이다. 이 시를 써놓고 혼자서 울었다. 이 글을 보면 막둥이가 생각나고, 시와 관련된 가슴 저린 얘기가 떠오른다.

철없이 뛰놀 나이에 혼자 낚시대를 담그고 있던 녀석을 멀리서 바라보며 장남인 나는 가슴이 아팠다. 해가 설핏하여 밥 짓는 연기가 고삿길로 번져갈 즈음이면 동네 엄마들은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들였고, 풀죽어 사립을 들어오던 녀석을 쳐다보며 내 가슴도 아려왔다. 멀리 저녁노을로 물드는 들 샘을 보며 눈물 고인 막둥이 눈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 밤이 아닌 3개월이 지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병석에 계신 아버님과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며 돈 벌이를 위해 집을 떠난 어머니. 힘들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야한다고 어머니는 판단했고 나는 그 결정을 따랐다. 중학을 졸업한 후 진학을 포기하고 졸지에 가장이 되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메꾸며 동생을 보살피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안쓰럽고 미안한 막둥이. 녀석은 밥을 주어도 먹지 않고 그냥 자 버리는 날이 많았다. 웅크리고 잠든 녀석에게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는 일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이나 들로 나갔다. 낫을 갈아 풀을 뜯었고 나뭇짐을 지고 어둑 무렵에 돌아왔다. 짐은 무겁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한 세월이 계속되더니 봄이 찾아왔다.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일어나고, 어머니는 돌아오셨다. 우리 집에도 햇볕이 들었다. 나도 내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힘들게 고개 하나를 넘고, 몇 번의 겨울을 지나 땀 흘리며 산 하나를 넘었다. 산등성이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가 꽃 이파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슴 아픈 일들이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런데 막둥이에게 미안한 일이 또 하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녹음기 한대를 샀다. 공부하는데 필요할 성싶어 큰맘 먹고 월급의 반을 뚝 떼어 장만했다. 출퇴근 때 이어폰을 꼽고 영어공부도 하고, 손때가 반질반질 할 만큼 녹음기를 끼고 살았다.

몇 년 뒤,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어 짐을 싸는데 막둥이가 나에게 물었다. “형, 그 녹음기 나 주고가면 안돼요?” 나는 못 들은 척 짐을 꾸렸다.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내 생애 첫 월급으로 산 물건을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고, 미국에 가서도 필요할 것 같아 가져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 보니 녹음기가 쓸모가 없었다. 주고 올 걸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 막둥이에게 미안했다. 몇 년이나 써서 고물이 다된 그까짓 녹음기 한 대를 보물단지 모시듯 미국까지 가지고 왔다니. 참 알량하고 짜잔한 형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길에서 헤드폰을 끼고 걸어가는 청년을 보면 막둥이가 생각나고 녹음기가 떠오른다. 이제는 어엿한 40대 가장이 된 우리 집 막둥이. 녀석을 생각하

면 늘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 정찬열, <우리집 막둥이> 전문 –

 

<# 11>

날씨가 푹푹 찐다. 잎사귀들이 축 처져있는 걸 보니, 이렇게 더운 날은 나무도 견뎌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뒤뜰 나무들에게 물주는 일을 잊었다. 해가 설핏하면 물을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는데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왔다. 물을 주었냐고 묻기에 깜박 잊었다고 대답했더니 잔소리를 시작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이든 남편들은 안다. 나도 담임선생님 앞에 선 초등학교 3학년 학생처럼 다소곳이 말씀을 들었다.

감나무, 대추나무, 레몬나무, 석류나무에 차례로 물을 주었다. 무엇보다 매화나무, 아내에게 구박을 받고 있는 저 가련한 녀석에게 더 많은 물을 주었다. 이파리도 시원하게 뿌려주었다.

저 녀석이 우리집 뒤뜰로 온 날이 20년도 넘었다. 거실 유리창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봄이면 누구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알려주는 저 녀석. 그러던 어느 해, 내가 저 녀석을 베어버리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펄쩍 뛰었다. 그 이야기로 시 한편을 썼다. ‘누가 시인일까’ 라는 제목이다.

“이사 온 다음 해 뒤뜰에 심었던 / 복숭아나무가 열매를 잘 맺지 않아 / 베어버리자고 했더니 / 아내가 펄쩍 뛰었다 // 저것도 목숨인디 / 잘 크는 나무를 뭣땜새 뜬금없이 / 잘라버리자 하느냐고 / 집안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 여인네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 속설을 믿고 혹시 그러냐고 / 기를 쓰고 말렸다 // 먼 산에 하옇게 눈이 쌓였는데 올 봄도 /

꽃망울 터트려 환한 봄소식 전해주는 / 나무를 바라보며 / 떠오르는 생각하나 // 하마터면 생목숨 잘릴 뻔 했던 / 녀석의 눈에는 / 누가 시인일까 / 나일까 / 내 마누라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녀석을 베워버리자고 한다. 나무가 오래되어 벌레가 떨어지고, 양 옆에 심은 예쁜 푸루베리아 꽃나무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다. 젊은 여인이 싱싱하고 매력은 있지만 나에게는 나이든 마누라가 더 이뻐 보인다. 참말이다. 믿기지 않으면 용현이 형님이나 동찬이 아우에게 물어보면 안다. 같은 이치다.

그러던 중, 엊그제 매화나무 가지 하나가 잘려나갔다. 나 없는 사이에 아내가 베어버린 것이다. 다시는 손대지 말도록 쐐기를 박아 놓았지만, 그 또한 모를 일이다.

요즘 아내의 잔소리가 좀 늘었다. 잔소리는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병든 새는 노래할 수 없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최소한 앞치마를 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홀연히 아내가 잔소리를 그친다면, 나는 얼마나 막막할 것이다. 어느 날 뜬금없이 잔소리를 들어줄 게으름뱅이 남편이 사라진다면 아내는 또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가련하고 불쌍한 매화나무. 이런저런 사단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늘 저렇게 고요하다.

– 정찬열, <불쌍한 매화나무> 전문 –

 

< # 12>

문학의 진정한 스승은 문학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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